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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씨의 휴가(2023)

 

여기에 검은 땅이 있다. 겨우 숨이 붙어있는 것들이 남은 생을 어찌하지도 못한 채 사라져가는 곳. 여러 겹의 낭만으로 손질되었지만 어딘가 너덜너덜하고 비릿한 이곳에 평범한 씨는 휴가를 왔다. 비행기는 굉음과 함께 이 가련한 땅에 착륙하고, 내딛는 첫 발에는 묵직함이 맴돌다가 가뿐히 사라진다. 일률적으로 늘어선 야자수와 정돈된 자연을 바라보며 씨는 이 꾸밈에 마땅히 응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씨는 슬픔이 삭제된 에덴동산이나 동양의 어느 설화에 등장한다는 무릉도원 같은 것을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기꺼이 그 환영幻影을 누리며 그는 자신이 모든 책임감으로부터 격리된 섬 같다고, 아니 오히려 알 속에 웅크리고 몸을 비비적대는 행복한 어린 새 같다고 생각한다.

그 견고한 평화의 바깥에는 음영이 짙게 드리워 있다. 이러한 어둠은 부드럽고 안락한 침구와 근사한 음식에 대한 대가, 당연하게 영위하는 것들로부터 마주하게 되는 당황스러운 불협화음 같은 것이다. 꿈과 환상의 터전에서 아무도 보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 것들이 그늘 밑에서 느물거린다. 부끄럽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들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행여나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긴 곡선을 그리며 우아하게 비껴가야 한다. 씨의 티 없는 행복은 그런 안온한 시선의 각도로부터 유래된다. 정돈된 낭만은 세계의 연결고리를 슬그머니 감추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을 살갗에서 뚝 떼어 내보인다. 그렇게 도려낸 일부분은 부자연스러운 눈웃음을 치며 세상의 전부인 양 행세를 한다. 결국 씨를 둘러싼 이음새들은 서로 접속되지 못하고 각자의 자리를 감내한다. 이쪽과 저쪽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듯이.

씨는 행복의 값으로 적지 않은 슬픔을 이 땅에 흘리고 간다. 소모되고 버려진 것들이 목메듯 울컥 쏟아지고,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땅은 소리 없이 서럽다. 그 속을 살아가는 삶들은 완벽한 타자이자 관조의 대상이 된다. 이들은 이동되고, 이식되고, 구경거리가 되어 마땅히 소비될 수 있는 무언가로 치환된다. 본연의 영靈과 생은 희석된 채 허공에 옅은 인상을 남길 뿐이다. 이렇게 무미건조한 표면으로부터 씨는 날것에 대한 희열을 느끼지만, 그 희열이 우월감을 양분으로 삼는 불균형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이 땅에 분명하게 기여하고 있다는 떳떳함으로 지울 수 없는 경계를 만들어 낸다.

씨는 렌즈 속에 자신의 행복을 끊임없이 각인시키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담뿍 지어 낸다. 어딘지 모를 헛헛함을 애써 감추려는 듯이 자연스러운 자세와 표정들을 마네킹처럼 번듯하게 화면에 담는다. 이는 자신이 이 순결한 땅에 존재했었다는 가장 합리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그 증명의 과정은 때때로 형식적이고 지루해서 문득 씨는 살짝 질린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본다. 거기에는 수많은 씨들이 각자의 즐거움과 공허함으로 저마다의 행복을 입증하고 있다. 반쯤 공중에 떠 있는 실체 없는 행복과 멀리 있는 불안이 묘하게 간질거릴 때 그들은 박제된 바깥의 것들을 슬쩍 곁눈질로 바라볼 것이다. 동시에 그 모호한 대면의 순간에 새어 나오는 복잡한 감정을, 견디기 힘든 무게를 후련하게 털어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뭇 부끄러움을 더부룩한 만족감으로 메워나가며 평범한 씨의 평범한 휴가는 선명한 웃음으로 켜켜이 퇴적된 짙은 자국을 남길 것이다.

​검정은 침묵의 동의어다(2022)

검정이라는 색은 침묵의 동의어다. 침묵 속에는 마주잡거나 이어진, 혹은 마지못해 엉겨붙은 이야기들이 있다. 모두가 일정한 시간선 위를 살아가지만 그 흐름 속에서 변화를 의식하고, 목격하고, 공감하는 것은 제각각이다. 변화라는 것은 자연스럽기도 하고 인위적이기도 해서 시선을 바짝 곤두세우지 않으면 모르는 새에 많은 것들이 무너지거나 세워지고, 이동하거나 정착한다. 각자의 언어가, 각자의 사정이,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현재의 시간은 경황없이 소란스럽고 분주하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끄집어내면 시커멓고 진한 이미지가 화면에 옮겨진다. 검은색은 고요하지만 사실은 무수한 현상의 북적이는 결집체 같은 것이다. 그래서 검은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한 힘을 갖는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에 어떤 틈이 있다고 했을 때 그 틈은 분명 배제된 것들의 잔잔한 슬픔으로 가득할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세상에서 시간은 그러한 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흘러간다. 나의 작업은 그 흐름에 불규칙적으로 끼어들어 일종의 제동을 거는 행위다. 잠시 멈춰서서 가만히 지금을 생각하는 것. 무엇인가 어그러져 있고 모순되고 잘못되었지만 제대로 인지되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예술이 가진 고유의 시각이자 깊이 각인된 본질일 것이다.

그러한 본질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내가 지금 바라보는 것은 바깥의 포장이다. 아름답게 장식되고 다듬어진, 사람들의 해맑은 웃음 같은 것. 그렇게 꾸며진 것. 하지만 나는 동시에 포장 속을, 가장 아래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가시화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폭력의 흔적이, 잊혀진 기억들이 검은 물이 되어 밑바닥에서 흐른다. 빛 뒤의 그림자, 표면과 이면 같은 단순한 개념으로 단정 짓기에는 훨씬 복잡하고 농후한 어떤 것들이다. 자본주의란 곧 선택의 이데올로기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을 골라내고 드러낼 것인가의 문제에서 선택받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 배제된 것들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침잠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성질이자 버릇이다. 이런 버릇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미지라는 수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미지는 칼인 동시에 방패가 되어 그 모든 이야기들을 느린 속도로 뱉어낸다.

나는 오랫동안 제주도를 작업의 소재로 삼았다. 나에게 있어 그 섬은 배제된 것들의 역사와 미래를 망망하게 성찰하도록 만드는 공간이자 작업의 구심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힘든 현상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내재화되어 끊임없이 마음 한켠에 축적된다. 그렇게 쌓인 것들이 너무도 많아 입 밖의 언어로 끄집어내는 것조차 버거울 때, 예술은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최선의 발언권이자 동력이 된다.

기꺼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의문을 가진다는 것은 밑 없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것처럼 두렵지만, 멈출 수 없이 유쾌하면서도 중독적인 일이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기억 깊숙한 곳에 각인되고, 나중에는 스스로를 형성하는 굵다란 뼈대를 이루며 삶 그 자체가 된다. 이런 연유로 내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각자 하나씩의 질문을 품은 채 세상 밖으로 나왔다.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실소가 새어나올 듯이 가볍게 제시되는 나의 이미지들은 흑백의 신문처럼 다양한 지면을 가진 기록물과 같다. 그리고 그런 경중 속에 담긴,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들에 보는 이가 공감하고 복잡한 슬픔을 느낄 때, 이는 이제 한 지역에 국한된 담론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넘어서서 타인에게 감응되는 과정이야말로 이미지 바깥으로 확장되는 아름다움의 형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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